(에반게리온 : 이카리 겐도 / 일명 팬티 고르는 것도 과하게 고민하는 남자)
VC의 시간
Reference Check을 통한 정보는 모였고,
앞으로는 VC의 시간이에요.
앞에 얻어낸 정보를 조합해 보면 대표이사는 보이는 것만큼 선하거나 정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에게 얘기한 것처럼 직원들을 잘 대하는 것 같지도 않아요. 그리고 계속 비자금을 만들고 있었죠.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이런 회사가 정말 많을 거로 생각해요. 특히나 오랜 기간 개인사업자로 운영하다가 법인으로 바꾼 케이스이거나, 지분이 거의 100%인 사실상 개인회사를 오랫동안 운영하면 이런 식으로 법인의 돈을 빼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게 사실이거든요. 그리고 서류도 잘 조작해 두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문제가 안 되는 배임 횡령도 꽤 되다 보니 사실 대표이사 입장에서는 그때까지도 별문제가 없다고 인식할 수도 있어요. 회계 장부상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요. 지인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통한 투자를 받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VC가 투자한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져요.
일단 법적 이슈가 나중에라도 터질 수 있어요. 퇴사한 직원들의 노동청 고발 같은 사소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그때까지 해오던 비자금 조성 과정을 누군가가 알거나 악의적으로 활용해 온다면 충분히 배임횡령 건으로 법적 조치를 받을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투자 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걸 알고도 투자한다면 저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더 나아가 제가 인바이트한 VC들도 나중에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를 원망할 가능성이 높았어요.
다음날 저에게 마지막 결심을 할 수 있는 정보가 하나 더 들어왔어요.
일정을 빠르게 앞당겨야 하다 보니 이미 재무 실사를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재무 실사 보고서 초안이 도착했고 실사를 진행한 회계사와 통화를 하게 되었어요.
회계사가 망설이면서 해 준 얘기는 가히 충격적이었죠.
대표이사에게 초안을 보여주면서 이대로 투자자에게 보고하겠다고 했더니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서는 이딴 보고서를 보고 누가 투자를 하겠냐고 화를 냈다는 거예요.
숫자를 좀 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꿔 달라고 굉장히 강하게 요청했고 대표이사의 태도가 180도 바뀌는 걸 보고 이 사실은 저에게 얘길 해주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네요.
제가 아는 대표이사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달랐지만, 이미 두 명의 퇴사자와 인터뷰를 마친 상황에서는 일견 이해도 갔어요. 대표이사는 겉 모습과 속 모습이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던 거예요.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어요.
대표이사에게 전화해서 실사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되었고 딜을 더 진행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했어요. 대표이사가 굉장히 당황해하면서 왜 드랍되는 것인지 끈질기게 물어왔지만 대답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면 안 되기 때문에 절대 말하지 않았죠.
그리고 다른 VC들도 하나둘 드랍 통보를 했는데, 그때는 또 저 때문에 다들 드랍하는 거라고 항의성 전화를 해왔어요. 저는 마음대로 생각하시라고 하고 끊긴 했는데 이런 지리한 항의성 연락이 2~3달 정도 간헐적으로 더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해요.
최근 찾아보니 회사는 매출액과 순이익이 나오는, 겉에서 보면 건실한 회사지만 속은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해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기업"과는 거리가 너무 먼 회사였고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씁쓸한 경험이었어요.
이 에피소드에서 제가 배운 점은 다음과 같아요.
1. 사람은 겉과 속이 아주 많이 달라요. 살면서 많이 보는 일이긴 한데 투자의사 결정 과정에서는 정말 중요한 요소예요.
2. 투자 의사 결정 시 Reference Check이 정말 중요해요. 저도 이 경험 때문에 레퍼런스체크에 신경을 많이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3. 속 터지지만, 역시나 모든 건 투자자의 몫이에요. 찜찜하거나 이상하면 반드시 확인하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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